"10년 영어공부하고도 입도 뻥끗 못한다." 이런 핀잔과 비난에 떠밀려 근년 한국의 영어교육은 말하고 쓰는 영어를 강조하는 모드로 바뀌기 시작했다. 영어교육 학자, 교사를 포함해서 언론 할 것 없이 이런 방향 변화는 옳다고 말한다. 과연 옳은 판단일까? 필자는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한국적 상황에서 말하기 교육은 종전처럼 가는 것이 더 낫다. 수능시험에서처럼 듣기 평가 형식으로 간접 평가를 하고, 읽기 교육을 더 강화하는 것이 옳다. 말하기와 쓰기는 대학생이 되어서 꼭 필요하고 배워야 할 동기가 확실할 때 시작하면 된다. 그동안 공교육의 영어 수업이 문법번역식 독해와 듣기 중심이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읽기와 듣기 영역에서는 긍정적 효과가 있었다.
몇 년 전에 중고교생을 대상으로 설문을 해본 적이 있다. 영어의 4가지 스킬 중에 가장 잘 하고 싶은 부분이 무엇이냐란 질문에 회화(speaking)라고 답한 학생들이 33%나 되었다. 외국 영화를 보거나 나중에 외국 여행이라도 가는 상황을 생각하면서 잘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매스컴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답했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해서라도 한국의 영어교육이 읽기와 듣기 중심에서 말하기 중심으로 바꾸어 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는 아마추어식 판단이다. 한국처럼 영어 회화를 배워도 생활 속에서 실제 사용할 기회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는 학습이 자동화에 이를 수 없으며 곧 잊어버리는 폐단이 있다.
이를 뇌과학적으로 설명한다면 어떤 표현을 배우고 익힌다는 것은 새로운 신경세포들 간에 전기화학적 신호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자주 이루어지고 반복을 통해 이것이 강화되어야만 필요할 때 자동적으로 회상하고 말할 수 있지만 수업시간 중에 일시적으로 형성되었던 세포간의 연결은 쉽게 사라지거나 약해진다. 다시 말해 회화를 배워도 사용의 기회가 없으면 쉽게 잊는다. 가르쳐 두면 나중에 사회에 나와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란 가정은 언어의 습득 원리와 뇌과학적 학습의 원리를 너무 모르고 하는 얘기다.
그래서 거듭 주장하지만 한국적 환경에서는 읽기/듣기 중심 교육을 하고 나중에 회화가 꼭 필요한 사람들은 절실한 사용 동기가 있을 때 그때 가서 하면 된다. 이 때 학교에서 배운 읽기와 듣기를 통한 어휘력, 문법지식 그리고 읽기를 통해 알게 된 내용 그 자체가 큰 밑바탕이 될 것이다. 읽기의 뒷받침이 없는 영어회화는 그저 길 묻기, 쇼핑할 때 값 묻기 등 서바이벌 수준의 영어인데 이런 영어는 지금처럼 학교에서 배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초중고 10년 동안의 영어 교육시간이 총 1,000시간도 안 되는 데 이 시간을 영어의 4가지 스킬에 골고루 배분하면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다. 거듭 강조하지만 한국처럼 말하기를 배워도 쓸 일이 없는 환경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매일이라도 할 수 있고 비용도 많이 들지 않는 읽기를 충실히 교육하는 것이 타당하고 효과적이다.
한국에서 배우는 영어회화의 경우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 한국의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는 실제 영어를 모국어나 제2외국어로 사용하는 나라에 가면 잘 통하지 않는다. 미국이나 영국으로 여행을 가보라. 호텔직원이나 식당 종업원이 하는 말, 지하철 안내 방송 등을 알아듣기란 매우 어렵다. 발음, 속도, 표현 등이 교과서 속의 영어와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폭넓은 읽기와 듣기가 뒷받침되지 않는 영어회화 교육은 한계가 있다. 외국인과 만나 한국의 문화나 경제, 정치, 사회문제에 관해 질문을 받아도 설명할 수가 없다. 이런 내용에 관한 읽기와 듣기가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어 수업시수는 그대로이면서 말하기와 쓰기를 시험에 포함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말하기와 쓰기 시험을 아무리 쉽게 출제해도 4 또는 5지선다에서 오답을 거르고 정답을 찍는 것과는 비교과 안 되게 어려운 과제이다. 당연히 학교의 수업은 말하기와 쓰기 시험 준비로 비중이 옮겨 갈 가능성이 높다. 시간이 갈수록 실제 사용의 동기 없이 시험의 동기만으로 시키는 영어 교육은 또 실패를 할 가능성이 높다. 말하기와 쓰기도 소수의 학생을 제외하면 잘 못할 것이고 독해 실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1,000시간도 안 되는 시간에 성취하기 어려운 높은 기준을 마련하고 거기 도달시키라고 독려하고 책무성을 물으면 이는 아이들을 사교육에 내모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필자가 교육출판 회사를 경영하던 시절 영어 말하기와 쓰기를 잘하는 직원들 몇 사람에게 영어 공부에 사용한 총 시간 수를 조사해본 적이 있다.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3만 시간이 넘었다. 영어의 사용환경이 아닌 나라에서 영어를 배우는 것이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린다. 배워도 사용할 기회가 없다는 점, 실제의 상황(real situation)에서, 실제의 의사소통의 목적(real purpose)을 가지고, 실제로 사람(real person)과 의사소통을 하지 않는 한 영어 습득은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다.
내년 한국영어교육학회에서 Stephen Krashen이 초청될 예정이란 얘기를 들었다. 그는 아시아 국가들의 영어 교육에 대해 조언을 구하면 그는 서슴없이 읽기와 듣기를 통해 영어에 노출 시간을 늘리라고 강조한다. 이를 바탕으로 나중에 말하기와 쓰기가 필요하면 그 때 가서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그의 말에 공감이 간다. 배워도 쓸 일이 없어 쉽게 잊어버리는 영어회화를 강조하는 쪽으로 한국 영어교육이 나아가는 것은 큰 우를 범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영어의 말하기와 쓰기를 강조하면 경제적으로 여유있고 학습능력이 뛰어난 아이들만 더 유리하게 만들어 준다. 영어의 격차를 점점 더 벌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기업에서 영어 말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만큼의 사람 수는 대학 이후에 충분히 양성되고 있다. 초중고에서는 한국 실정에 맞게 영어교육에서도 선택과 집중의 묘를 살릴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